독서평2021. 4. 19. 00:14

읽은 책 : 양승훈,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 산업도시 거제, 빛과 그림자, 파주 : 오월의봄, 2019.

 

 

1. 책의 질문 : 지방 산업도시는 어떻게 부흥하고 쇠락하는가?

 

서울은 한국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청와대와 국회가 있는 정치의 중심지이며, 경제·언론·문화·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흔히들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최근에는 특히 서울에 부동산이 있어야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생각도 만연하다. 일기예보까지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보도하는 일도 많다. 이러한 현상들은 한국의 유난한 수도권 집중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수치로 보자면 2019년도 서울의 인구는 약 966백만 명으로, 2의 도시라는 부산 인구(337백만 명)의 거의 세 배에 달했으며, 동년도 지역 내 총생산(GRDP)(추정값)은 서울이 약 433조 원, 부산이 약 92조 원으로 4.5배가 넘는 차이를 보였다. (e-나라지표 웹사이트 확인 / 접속일 : 2021.3.14.) 행정적으로 구분되는 서울을 넘어 거의 같은 경제·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경기도와 인천을 포함하면, 그 인구와 GRDP는 전국의 50% 수준에 육박한다. 이렇게 보자면, 때로 서울이 한국 그 자체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1968년에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원제 :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를 쓴 前 주한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은 “[파리가 프랑스에 대해 그랬듯] 서울은 단순히 한국의 가장 큰 도시가 아니라 한국 그 자체였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서울 중심주의 시각으로 보면 간과하기 쉽지만, 지방에도 나름대로 많은 시민들이 부를 누리며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는 지방도시들이 있다. 사실 오늘날까지 한국의 경제적 부를 이끌어온 중공업 사업들 중에는 서울이 아닌 지방을 기반으로 생산활동을 펼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 산업도시가 창출하는 경제 가치는 서울 못지않다. 대표적인 산업도시인 울산의 경우 2019년 추정 1인당 GRDP 65백만 원으로, 서울(45백만 원)보다 2천만 원 이상 높게 나타났다. 절대적인 경제 규모는 서울에 비해 약소할지언정, 산업도시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울의 평균 수준 이상의 경제 수준을 누리며 살 수도 있는 것이다. (pp.21-26)

 

그렇다면, 지방의 중공업 도시는 어떻게 흥하고 망하는가? 국내외의 경제·사회 조건들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공업 도시의 구성원들은 어떤 삶의 변화를 겪는가? 변화의 기로에 선 지방 산업도시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바로 이렇게, 서울 중심주의 시각에서 경시되는 지방 산업도시의 변천에 대한 질문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정치학과 문화인류학을 공부한 뒤 거제의 조선소(대우조선해양)에서 5년간 근무했다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는데, 이 책에서는 정치학적·문화인류학적인 통찰을 조선소 근무 경험에 접목하여 산업도시 거제의 흥망성쇠를 다룸으로써, ‘서울 촌놈에게 사각지대였던 지방 중공업 도시의 모습과 변천을 때로는 실감나게, 때로는 분석적으로 조망한다.

 

 

2. 미시적 시점 : “중공업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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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연구자의 길을 목표로 공부를 하던 중, 몇 권의 책들을 통해 제조 대기업 현장을 직접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조 대기업 실무자로 진로를 변경했다고 한다. 저자는 수많은 낙방 끝에 거제에 있는 조선소에 서류합격이 되어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는데, 하늘색 공장으로 가득 찬 조선소에서, 마치 군복과 같이 작업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상 모르는 샌님이 되어버린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인구의 40~50% 이상이 조선소에서 근무한 조선업 도시 거제의 모습이,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학교에서 공부만을 해 온 저자에게는 무척 생경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안정적이고 돈 많이 주는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주변의 선망과, ‘대우조선 정도 다니면 다 된다는 대기업 직원들의 자부심에 점점 익숙해지며, ‘대기업 뽕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pp.27-34)

 

거제에 거주하며 조선소에서 근무한 내부자인 저자는, 조선소의 직원 공동체와 그 가족 구성원들을 함께 지칭하는 이중적 개념으로 중공업 가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한국의 기업체에서 80년대 후반 이후 흔히 사내 공동체(회사-가족 공동체)를 가족에 비유해 사용하는 표현(‘대우가족’, ‘현대가족’, ‘또 하나의 가족, 삼성)에서 차용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 지방의 제조 대기업 종사자를 중심으로 한 가족구성이라는, 특유의 가정환경을 언급하기 위한 언어로도 보인다. (저자가 조주은의 현대가족 이야기를 읽고 제조 대기업의 현실을 경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언급하기도 했으니, 그 책의 현대가족에 대한 레퍼런스일 수도 있겠다.) 저자는 중공업이 만들어낸 가족 모델을 살피지 않고서는 조선산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해하기 어렵다”(p.57), 단순히 어느 중공업 도시의 부침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의 삶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중공업 가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의 도입부에서는 조선소의 하루 일과가 묘사되는데, 특히 저녁 시간 부분에서 조선소 노동자와 그 가족이 어우러지는 이 중공업 가족이라는 개념이 실감나게 와 닿는다.

 

거제고와 해성고 앞에는 학생들을 기다리는 스쿨버스가 즐비하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학생들을 귀가시키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이 버스는 아침에는 아빠가 출근하기 위해, 점심에는 엄마가 회사 문화센터를 가기 위해 탔던 버스다. 엄마 아빠를 태웠던 차는 아이를 귀가시키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친다. (pp.11-12)

 

중공업 가족의 중심이 되는 것은 조선업에 종사하는 남성 직원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이들의 모습은 여러 부분에서 직업군인들과 흡사하다. 80~90년대부터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어 온 이들은 새벽같이 출근해서 체조와 아침식사로 하루를 시작하며, (마치 군사도시에서 직업군인들이 그러하듯) 퇴근하고서도 회사 마크와 부서 이름이 박혀 있는 작업복을 입고 조선소 직원임을 뽐내며 외출을 하고 회식을 한다. 대부분이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었다는 것도 어찌 보면 군인과 비슷한 부분이다. 이들은 평생에 걸쳐 실제 가족보다 조선소에서 동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함께 식사를 하며 (동료들이 그야말로 함께 밥을 먹는 식구(食口)인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이 명확하지 않은 일상을 보낸다.

 

조선소의 정규직원 외에도, “직영은 아니지만, 90년대부터 대량 수주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야근과 휴일작업, 그리고 임박한 납기일을 맞추기 위한 돌관작업에까지 주로 투입되는 사내하청(“외주”) 노동자들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돌관돌파해 관철하는 것을 일컫는 준말(p.104)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도 한꺼번에 기운차게 어떤 일을 함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한자로 검색했을 때 일본어의 돌관공사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아, 작업현장의 용어가 으레 그러하듯 일본어에서 차용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일반 한국어 화자에게는 강행이라는 표현이 더 와 닿을 것 같다.) 회사는 정규직 채용에 따른 고정비용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으로 사내하청의 숫자를 늘리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1990년 정규직의 20%정도 수준(7,300여 명)이었던 하청 노동자의 수는 2014~2015년 해양플랜트 사업 절정기에 정규직의 5~6배 수준(3~4만 명)까지로 늘어나게 되었다. 비정규직의 유연성으로 인해, 하청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하위 신분으로 여겨진다. 이는 일종의 카스트와 같은 신분질서로, 조선소의 노동조합은 노사협의 의제로 사내하청 처우 개선을 내걸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항상 그러하듯, 우선순위가 밀려 개선이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들 외에도, 2008년 이후로는 해양플랜트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한 외국인 노동자들도 다수 유입되었다. 정점에 달했던 2015년도에는 99개국 15천 여 명의 등록 외국인이 거제에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단기체류로 외국인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외국인까지 합치면 약 2만 명 이상으로, 거제 인구의 10%에 달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렇듯 외국인구가 많아지며 옥포국제학교가 2013년 확장 이전하였고, 외국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외국인 거리가 호황을 누리고, 덕포 해변 인근에는 거제 영어마을이 세워졌다.

 

조선업 도시인 거제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차이가 확연한 곳으로, 여성이 취직할 수 있는 업종은 많지 않다. 거제에서 중공업 가족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여성들 중에는 타지에서 결혼을 위해 전입해 왔거나, 조선소에서 사무보조(서무) 업무를 하다 정규직 남성 직원을 소개받아 결혼하고, 출산과 함께 퇴직하여 전업주부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문화센터 등을 통해 다른 동성들과 네트워크를 이루어 가사와 관련된 정보를 교류하며, 남편에 대한 내조를 수행한다. 오늘날 서울에 사는 직업여성의 입장에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들은 조선소에서 일하는 남편의 수입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중산층 가정에 취집한 주부정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중공업 가족의 딸들에게는 애초에 지방 중공업 도시에서 다양한 역할이 허용되지 않았다.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댄스스포츠 동아리를 소재로 한 영화·드라마 땐뽀걸즈에서처럼, 그들에게도 학창시절 잠시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들의 어머니가 그랬듯 조선소에 취업하거나 조선소 직원과 결혼하여 중공업 가족에 다시 편입되지 않는 한, 거제를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터를 잡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인구 유동성을 보면, 실제로 많은 20~30대 여성들이 교육이나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 또는 부산·경남의 도시 지역으로 전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에는 수도권 대학으로 진학해서, 부모가 수도권에 마련해 둔 집에 거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수도권이 별천지요, 끝없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질 것이다. 기존 중공업 가족의 어머니들도 외지에서 들어온 경우가 많긴 했지만, 조선업의 미래가 어두워지며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 언제까지 유지될 것인지 불분명한 오늘날, “중공업 가족을 벗어난 서비스업종이 대폭 늘어나지 않는 한, 이 딸들이 거제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중공업 가족의 중심을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래 거제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아니라, 외지에서, 또는 아예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공업 가족과 그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을 바탕으로, 거제라는 산업 도시의 풍경과 문화를 만드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조선업이 침체되며, 이런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에 기반한 중공업 가족프로젝트도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우조선 부실을 시작으로 조선소들의 미래가 어두워지며, “중공업 가족을 이루고 재생산하던 메커니즘이 전과 같이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한국 산업의 한 축을 맡았다는 자부심에 차있던 조선소 직원들은, 갑자기 국고를 축내는 부실 좀비기업의 직원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다. 조선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가운데, 지방근무를 선호하지 않는 수도권 출신 청년들은 다른 회사로 이직하며 급속도로 거제를 빠져나가게 되었다. 아직 조선소를 좋은 회사라고 생각했던 지방(경남) 출신 직원들은, 수도권 좋은 학교 출신 동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딱히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더 사기를 잃는다. 2015~2016년도 밀려오는 해양 플랜트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대량으로 동원된 뜨내기비정규 하청 직원들은 애초에 조선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남성 직원들의 안정적인 고용과 고임금을 기반으로 한 중공업 가족프로젝트에 제동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본인의 조선소 근무 경험과 사회학적인 통찰을 조합하여, 지방 산업도시 거제에 사는 중공업 가족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의 내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더 나아가,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한국 조선업이 흥하며 거제가 산업도시로 발전하게 된 흐름, 중공업 가족이 만들어진 기반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거제에 사는 중공업 가족의 모습을 그린 미시적 시점, 그 근간이 되는 조선업 발달사의 흐름을 좇는 거시적 시점이 교차되는 것이다.

 

 

3. 거시적 시점 : 국제환경의 변화와 한국 조선업의 흥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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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중공업 가족의 모습을 조망하는 중간 중간 세계 조선업사의 흐름에 대한 얘기를 더한다. 짧게 요약하자면, 1960년대까지는 근대 조선산업의 역사를 시작한 영국이 리벳 건조 방식앞세워 세계 조선 챔피언의 자리를 지켰으나, 1970현장점거 (work-in) 투쟁과 함께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고, 저렴한 인건비를 앞세운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조선업이 잠시 호황을 누리다 이내 가라앉고, 1970~1990년대는 생산방법의 혁신과 안정적인 인력공급을 바탕으로 한 일본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성장의 한계로 장기적인 침체기를 겪고, 한국은 장기간의 대규모 투자와 메가 블록 건조 공법이라는 생산기술 혁신, 그리고 중국의 부상이라는 호재에 힘입어 2010년대까지 세계 조선업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저자가 표시한 것처럼, 간단하게 이에 대한 내용을 다룬 기사도 있다. (조선비즈 2010.10.11. “[··경제대전] '리벳''용접''도크' / 접속일 : 2021.3.27.))

 

저자가 거제의 중공업 가족얘기를 하다가 한 번씩 이렇게 낯선 세계 조선업의 흐름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는, 거제 중공업 가족의 형성과 미래를 한국 조선업의 부침이라는 더 큰 틀에서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조선업이 발달한 다른 도시인 울산에는 조선업 이외에도 자동차산업이나 석유화학산업 등이 큰 규모로 운영되는 반면, 거제는 취업인구의 약 2/3이 조선소나 그 관련산업에 종사하는, 그야말로 조선산업으로 먹고 사는 도시이다. (pp.42-43) 거제의 인구변동도 한국 조선업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하여, 거제에서 조선업이 시작되던 1975년 거제시의 인구는 11만 명이었는데, 1990년대 이후 조선산업이 확장하며 인구가 견고하게 성장하였고, 2015년에는 인구가 25만 명을 넘게 되었다. (p.47) (책의 내용을 업데이트하자면, 2016년 이후로 한국 조선업이 침체기에 들어서며 거제의 인구추이도 완만한 하락세로 돌아서, 2019년에 다시 인구가 25만 명 아래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거제 중공업 가족은 책 1부의 제목(“조선소, 가족을 만들어내다”)처럼 조선소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들의 내일이 조선업의 미래에 달려있다는 것도 자명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저렴한 인건비와 생산기술 혁신을 통해 한 시대의 세계 조선업을 이끌었던 국가들은, 인건비의 상승과 새로운 생산기술의 도래에 대처하지 못하며 다른 국가에게 조선업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그리고 한때 수많은 노동자로 붐볐던 조선소들은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어쩌면 조선업 도시 거제의 미래도 이러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2010년대 중반부터 여러 곳에서 한국 조선업의 절정기가 지나갔음을 보이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2014년경에는 주요 조선업체인 대우조선해양의 부실이 드러나며 한국 조선업의 경쟁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한때 한국 조선업체들이 새로운 먹거리로 개척하려 했던 해양플랜트는, 해양플랜트 내에 탑재되는 장비들에 대한 기술력의 부재로 새로운 주요 사업이 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승객이나 상품을 운반해야 하는 선박을 건조할 때는 효율적으로 실을 수 있도록 잘 비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특수 목적을 가진 해양플랜트의 경우에는 목적에 맞는 장비를 잘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설명이 와닿는다. 최근 일본과의 무역 분쟁으로 이슈가 되기도 한 소재·부품·장비 원천기술 부족, ‘해양플랜트 제조 경험/전문성 부족이 해양플랜트 사업 개척에 한계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국제적인 조건도 악화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 조선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중국의 고도성장에 의한) 세계 경제 호황기도 지나가고, 앞으로는 뉴 노멀이라는 장기적 저성장 국면이 예상된다. 여기에 더해, 세계화가 진척되며 조선업의 국제 협력도 활성화되어, 동남아에서는 싱가포르의 자본 / 말레이시아의 저렴한 노동력 / 유럽 엔지니어의 기술력을 결합한 새로운 조선산업이 부상하여 한국 조선업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 조선업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며, 조선기업들은 새로운 인재 유치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거제시의 경제구조에서 조선업 단일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지 못하고 (, 조선업 외 다른 산업을 활성화하지 못하고), 거제의 조선소들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지방 조선산업 도시인 거제도 영국의 고반 조선소나 스웨덴의 코쿰스 조선소의 선례를 따를 것이다. 거제의 경제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위축되어 갈 것이며,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을 기반으로 한 중공업 가족도 해체되거나, 적어도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갈 것이다. 저자는 이렇듯, ‘거시적인 산업의 발전/쇠퇴미시적인 중공업 가족의 삶을 연결성을 전제하고 글을 이어나간 것이다.

 

(책에서 한번씩 언급되는 “말뫼의 눈물”은, 1970년대~1980년대 스웨덴 말뫼의 코쿰스 조선소에서 사용되던 크레인(‘코쿰스 크레인’)이, 조선소 폐업 이후 2002년 현대중공업에 1달러에 인수되어 울산 조선소로 이동하기 위해 철거될 때 말뫼의 시민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코쿰스 크레인 LAB2050 기사 말뫼는 정말 눈물을 흘렸을까?” / 접속일 : 2021.3.27.))

 

물론, ‘한국 조선업의 쇠퇴그에 따른 거제의 쇠락이란 것이 정해진 운명은 아니다. 실제로, 이 글을 쓰며 확인해보니, 20211분기 한국 조선업계의 선박 수주 물량은 532CGT(126)으로, 전세계 물량 1024CGT(323)의 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한국 조선기술의 높은 신뢰성과, 친환경 기술력으로 인해 향후로도 호조가 예상된다고 한다. 20213월 말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되어 약 일주일 동안 운하를 가로막은 에버 기븐 호가 일본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며, 일본 조선기술에 대한 불신으로 한국 조선업계가 이에 대한 반사이익으로 향후 수주가 더 많아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언론사들은 한국 조선업계의 부활이 예상된다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매경ECONOMY 2021.4.14. “K조선 `부활 뱃고동`...전 세계 발주량 절반 `싹쓸이`했다/ 접속일 : 2021.4.17.) 그러나 한국 조선업이 성행하게 된 근간 원인(한국의 낮은 인건비, 세계적인 경제 호황, 블록 대형화라는 기술 혁신)이 누그러든 오늘날, 이런 호재는 근본적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조선업계에서는, 북유럽이 그러했듯 럭셔리 크루즈선 등 독자적인 기술이 요구되는 특수선 건조를 통해 한국 조선업의 안정적인 먹거리를 확보하는 등의 대안이 필요하고, 거제시의 입장에서도 조선업에만 의존하는 구조를 탈피하여 다양한 산업을 활성화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언젠가 다시 한국 조선업의 쇠퇴기가 찾아올 때 거제도 함께 쇠락을 맞게 될 것이다.

 

 

4. 독서평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사회과학/문화인류학적인 시각으로 지방 산업도시 거제의 모습을 조망하려 한 책이다. 저자는 조선소의 가족으로서의 직원그 직원들의 실제 가족을 아우르는 중공업 가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방 산업도시 구성원들의 독특한 사회·문화에 이름을 붙이려 시도하고 있으며, 조선업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의 조선업을 바라보며 이 중공업 가족의 미래를 좌우할 요소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거제 조선소에서 근무했던 경험과 젊은 사회과학자로서의 세심함을 결합하여, 한국 경제에서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대부분인) ‘서울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 산업도시의 세세한 면면을 소개한다.

 

저자는 이 책을 어쩌다 연구자의 입장으로 썼다고 한다. 계속 학계에서 학술적인 글을 써 온 것이 아니라, 조선소 직원으로서 근무를 하다 다시 학계로 돌아오게 되어 글을 썼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학술적인 엄밀함보다, 기업체의 기획서와 같은 과감함과 전달력에 더 치중했을 수 있다는 양해의 의미일 수도 있다. 전문 학술서로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보자면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가 제시하는 중공업 가족이라는 개념의 외연은, 사실 조선소에만, 그리고 더 나아가 중공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회사가 곧 가족이고, 회사와 가정생활이 밀접하게 연계되어 돌아가며, 회사의 영향권(?) 안에서는 다같이 작업복을 입고 동질감과 소속감을 뽐내다가, 그 회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게 되면 오히려 주눅이 들게 되는, 그런 중공업 가족의 모습들은 사실 한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공업 가족이란 모습이 나타나게 된 원인처럼 지목되는,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나 (비정규직/여성에 대한) 배제와 (정규직/엘리트에 대한) 포섭도 거제/조선업만의 특수한 사례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중공업 가족이라 하면 중공업만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저 한국적인 기업문화의 (드물지 않은) 한 형태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책 안에서 저자도 잠깐 언급하는, 군인 도시(계룡대)의 모습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거제에서는 도시 전체가 조선업이라는 한 가지 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그 규모와 비중이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게 보이기는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중공업 가족이란 개념의 내포를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무엇이 중공업 가족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구별하고, 거제의 중공업 가족이 다른 비슷한 사례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규명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실, 저자는 이러한 부분도 염두에 두었는지 많은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한다. 가령, 울산도 조선업이 입지한 중공업 도시이지만, 거제처럼 조선업에만 치중한 도시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제의 중공업 가족, 울산 중공업 관련자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준다면, “중공업 가족이라는 개념이 거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일반화될 수 있는 길이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책 속 그래프들이 회색조로만 표현되어 있고, 그래프 양 축에 단위가 명시되지 않아 보기 힘들다는 점도 학술서로서는 마이너스 요인이다. 물론 본문의 내용을 읽으며 맥락을 따라간다면, 그래프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래프들이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학술서로서의 책의 가치를 더 저해하는 요소로 보여 아쉽다.

 

이러한 작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지방 산업도시의 모습을, 디테일하고 의욕있는 젊은 사회학자의 시선에서, 그러면서도 대중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쉽게 소개한다는 큰 장점을 가졌다. 위에 중공업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라고 쓴 점에 대해서도, 책에서 직접적으로 그 부분들에 대해 질문하고 답변하는 부분은 없지만, 사실 저자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방대하고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어쩌다 연구자로 이렇게 한국사회학회 학술상까지 수상한 책을 쓰게 되었다는데, 앞으로 더 깊은 내공과 경험으로 한국 기술/산업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보여줄 저자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Posted by 푸른삼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