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 :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사피엔스』, 파주 : 김영사, 2015.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 대해 얘기할 때, 일반적으로 선사-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시대구분을 사용한다.
① 석기를 활용한 수렵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문자가 발달하지 않아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지 못한 선사시대
②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철학과 기술이 발전하여 문자와 철기를 사용하게 된 고대
③ 군주와 가신들이 봉건제로 연결되고, 종교를 바탕으로 한 사회질서가 유지된 중세
④ 서양에서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서양의 문물이 세계로 퍼져나간 근대
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쳐, 자본주의와 인터넷으로 거의 전 세계가 연결되고, 과학기술 연구를 통해 미래를 열어가는 현대
각 시대별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략적인 느낌은 위와 같을 것이다. 주입식 교육의 수혜로 세계사 정보가 각인되어 있는 경우엔,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18세기 영국 산업혁명’하는 식으로, 시대들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되는 사건들도 대략적으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의 발전과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각종 문명이 흥하고 망하기를 반복한 중에도, 현생인류(Homo Sapiens, 이하 사피엔스)의 한계를 규정하는 생물학적인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또한, 생물학적 제약에서 오는 인간의 욕구와 한계도, 위와 같은 시대구분에 따라 명확히 나뉜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특정 문명의 흥망성쇠에 따라 전개되는 기존의 역사 서술방법에서 벗어나, 사피엔스라는 종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다른 종에서 진화하여 오늘날과 같은 사피엔스의 특색인 사회적/개별적 특성을 갖추게 되었으며), 어떻게 끝나갈 것인가(새로운 형질을 갖추게 되어 더 이상 사피엔스라고 불리지 않게 될 것인가)를 다룬다. 다시 말해, 문명사라기보다는 인류사라는 빅 히스토리의 관점으로 사피엔스라는 종의 전체 역사를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하면서, 하라리는 위의 선사-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구분 대신, 인지혁명-농업혁명-과학혁명이라는 새로운 구분을 사용한다.
시기 | 문명사 | 특징 | 사피엔스사 | 특징 |
약 30~20만 년 전 | 선사시대 | 석기·청동기·철기시대 기초적인 정치제도·기술 발전 | 등장 | 아프리카에서 사피엔스 탄생 |
약 7~3만 년 전 | 인지혁명 | 유연한 언어·추상적 사고 가능 사피엔스에 의한 환경변화·대멸종 | ||
약 1만 2천 년 전 | 농업혁명 | 인구밀도 증가 → 도시 형성 신분질서, 종교, 제국 등장 사피엔스 개체 수 증가, 개체의 생활여건 악화 | ||
~기원 후 5세기 | 고대 | 그리스·로마 시대 서양문명의 근간 형성 | ||
5세기~14세기 | 중세 | 봉건질서·종교 중심 사회 | ||
14세기~17세기 | 르네상스 | 인문주의·지리상의 발견 | 과학혁명 | 과학적 방법을 통한 강한 개인·국가·시장 ↔ 약한 공동체 사피엔스 개체 수 폭증, 환경변형 개인의 행복은 크게 차이 없음 |
18세기~20세기 초 | 근대 | 산업혁명·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이념대두·세계대전 | ||
~현재 | 현대 | 미소냉전 후 중국의 부상 미국 단극체제·세계화·환경문제 | ||
21세기~ | 미래 | 지구적 차원의 자원·환경문제 제4차 산업혁명 (현실·가상 혼합) | 길가메시 프로젝트 → 사피엔스의 종말 |
먼저, 인지혁명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까지의 시기 사이에, 사피엔스가 (최근 많은 사람들이 믿는 바로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우연히 뇌내 배선이 변화하여) 유연한 언어를 사용하고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변화를 의미한다. 생물학적으로 사피엔스가 오늘날과 같은 신체구조를 갖추게 된 것은 약 20만 년 전으로 여겨진다. (최근DNA 분석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하며, 2015년 사피엔스가 발간된 이후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며 이 연대가 약 30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수만 년 전까지 지구상에는 적어도 여섯 종 이상의 ‘인류(Homo)’ 종이 존재했으며, 사피엔스도 그 중 하나에 불과했다. 침팬지와 오랑우탄이 다르듯, 사피엔스도 네안데르탈렌인, 데니소바인 등 다른 인종들과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사피엔스에게 인지혁명이 일어나자, 사피엔스는 공동체라는 허구(fiction)를 통해 무리를 구성하고, 최대 150명 정도 규모로 조직적이고 복잡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로, 사피엔스는 다른 인류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사피엔스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하고 두뇌용량까지 더 컸던 인류종들도 경쟁에서 밀려 멸종을 맞게 되었다.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벗어나 약 3만 년 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가는 곳마다 경쟁 인류를 도태시킬 뿐만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키고 생태계를 바꾸어나갔다.
다음으로 약 1만 2천 년 전에 농업혁명이 시작되며, 사피엔스의 생활양식이 수렵채집 생활에서 정주 농업생활로 변화하게 된다. 농업은 (길들여질 수 있는 동식물 자원이 있었던) 세계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했던 수렵채집 경제에서와 달리 농지에서 일정한 수확이 이어지며 단위면적당 인구부양능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구밀집지역인 도시가 생겨났고, 많은 수의 개체들이 질서를 지켜 살 수 있게 하는 법률과 종교, 정부 등의 사회제도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신분질서가 생기고 성별(gender)에 따른 차별이 발생했으며, 경제가 전문화되며 화폐가 생겨나고, 다양한 문화를 아우르는 상위질서인 ‘제국’이 나타났다.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사상 최대의 사기극(History's Biggest Fraud)이라고 지칭하는데, 농업혁명을 통해 종으로서의 사피엔스는 개체(DNA) 수를 대폭 늘릴 수 있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사피엔스 개체들은 수렵채집 생활에서 없었던 각종 질병, 환경재난, 영양실조, 과로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재미있게도, 사피엔스에 의해 가축화된 동물들도 개체 수는 늘었을망정 생활환경은 이전에 비해 악화되었다.) 인구 부양력을 유지해야 하는 정주 농민들은 심지어 외부의 위협에 대해 자유롭게 거주지를 옮길 수도 없었다. 하라리는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우리를 길들인 것(domesticate : ‘집에 있게 하다,’ 곧, “밀이 사피엔스를 집에 살게 만들었다”라는 의미)이라는 농업혁명의 역설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약 500년 전에 시작된 과학혁명은, 과학적 방법(관찰을 통한 가설 검증)을 통해 지식의 검증과 축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피엔스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과학적 방법으로 그 미지의 부분을 탐구함으로써, 새로이 의학적·군사적·경제적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신용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산업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과학기술에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이 축적되게 되었고, 이를 과학기술에 투자하여 권력(power)을 얻은 세력이 다시 과학기술에 투자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며 과학적 지식의 생산과 축적이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원동력이 된 자본주의는 투자로 얻어진 이윤이 다시 투자되어 투자자의 이윤을 끊임없이 증식시키는 구조로 운영된다. 서구 열강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다른 세계에 전쟁을 걸어 식민지배하고 노예무역에 앞장섰으며, 세계의 자원을 고갈시켜갔다. 이는 오늘날 흔히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공산주의 실험의 실패에서 보듯 자본주의를 떠나 살기 어려우며, 최근에는 점진적으로 개발도상국들에서도 부가 축적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원 고갈에 대해서도,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며 새로운 자원들이 개발되어 고갈의 걱정이 없어지고 있다. 사피엔스 개체가 폭증하며, 사피엔스의 활동으로 인한 환경 변형(인간의 입장에서는 ‘환경파괴’이라는 시각이 익숙하지만, 하라리는 ‘환경’은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변형이 될 뿐이라며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다.)이 광대해져, 사피엔스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으나, 자본주의 체재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과학혁명의 결과로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사피엔스 개체들은 개인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며, 가족과 공동체가 해체되는 유례없이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사피엔스의 진화심리학적 특성은 수렵채집 시기로부터 변화하지 않아, 현대인에게는 가족과 공동체의 대체물이 필요했으며,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와 시장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힘이 강력해졌다. 그러나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행복감이 수렵채집이나 농경시대의 행복감에 비해 늘었다고 볼 근거는 부족하다. 연구에 따르면 복권에 당첨되어도 행복감은 1년 반 정도만 지속될 뿐이라고 하며, 행복이란 객관적 조건보다 내면에 달려있다고 보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 실상, 사피엔스 개개인의 행복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야 이뤄지고 있어 아직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으며, 하라리는 “행복을 포함한 모든 감정은 일시적이다”는 불교의 통찰에 주목하여 “행복감만을 좇고 고통을 피하려는 집착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오늘날의 과학혁명은 사피엔스의 근본적 한계인 ‘필멸’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라리는 (고대 수메르의 ‘불멸’을 찾는 길가메시 이야기에서 이름을 딴)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통해, 사피엔스가 과학혁명을 통해 유전자 편집, 기계와 생체의 혼합 등의 새로운 기술을 손에 넣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피엔스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신적인 (생명조작) 권능을 지닌 새로운 종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곧 사피엔스라는 종의 종말인 것이다.
사실 『사피엔스』에 담긴 각각의 내용을 학술적으로 새롭고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자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재미있는 사실들을 전달하기는 하지만, 개별적으로 보아 전적으로 저자의 새로운 이야기라든가, 기존에 없었던 시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최근까지의 과학기술적 발견들을 정리하여, 기존의 인류 문명사 서술방법이 아닌, 사피엔스라는 종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시각을 옮겼다는 점이 빅 히스토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피엔스라는 ‘종 전체’와 ‘개별 인간’을 대비함으로써, 농업혁명 이래 사피엔스의 역사적 발전이 역설적으로 개개인의 복지와 행복에 장애가 되었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사피엔스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도 『사피엔스』의 의의일 것이다. 가령, 하라리는 “길가메시 프로젝트”로 인해 초인적인 신체/두뇌능력을 갖춘 불로불사의 새로운 인류가 출현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러한 신체강화 기술의 수혜를 누릴 수 있는 개체는 한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렇게 되면 사피엔스가 우월한 신인류에 복속되어, 새로운 인류 간의 신분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 하라리의 예견이다.
무엇보다, 『사피엔스』는 무척 대중 친화적으로 쓰인 책으로, 이 책을 통해 오늘날의 과학기술적 발견과 인문사회적 지식이 어우러진 시각들이 한층 더 대중적인 교양지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된다. (실은, 학계에서는 이미 익숙한 주장인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가령, “옛날 우리 선조들은 자연과 어우러져 생활을 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피엔스는 가는 곳마다 다른 인류를 포함해 다양한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환경을 변화시켰다”는 내용이나, “생활환경이 많이 변했음에도, 사피엔스의 진화생물학적 형질은 수렵채집 시기에서 변화하지 않았다”든가,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사피엔스 개체가 이전 시대의 개체보다 더 행복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 등은 대중에게 다소 낯설 수 있는 내용들인데, 이 책이 대중적으로 많이 읽힘에 따라 ‘교양인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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