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평2021. 3. 7. 15:20

 

중고서점 일본원서 코너를 둘러보고 있었다. 중고서점의 해당 코너가 항상 그렇듯 만화책과 라이트노벨 일색이었는데, 그 사이에서 묵직한 존재감으로 시선을 잡는 책이 있었다. 窓際のトットちゃん- 한국에 창가의 토토로 알려져 있는 그 책이었다.

 

사실 난 창가의 토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릴 적 동생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보며, 미하엘 엔데의 모모비슷한 아동문학 정도로만 생각했다. (창피한 얘기지만, 실제로 이름도 비슷해서 헛갈린 나머지, 토토도 유럽 어느 나라 작품일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찾은 窓際のトットちゃん도 일본 출판사인 고단샤의 초/중학 도서 전문 '아오이토리(파랑새)문고'에서 출간한 책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아동문학을 통해 일본어를 학습하려 한 듯, 앞의 몇 챕터까지는 어려운 단어에 밑줄이 그이고 사전 뜻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눈을 끈 것은 저자의 이름이었다. 구로야나기 데쓰코. 일본 최초의 TV 여배우 중 하나로, 1976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43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데쓰코의 방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원로 중의 원로 탤런트이다. 일본 방송을 통해 "할머니 방송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아동문학도 썼다니... 호기심이 발동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본 아동도서나 읽어볼 겸 책을 집어들었다.

 

책은 토토(어릴적 저자에게는 "데쓰코"라는 이름이 "토토"라고 들려서, 본인 이름을 토토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다)라는 여자아이가 북을 치며 광고하는 진돈야(チンドン) (우리가 익숙한 것으로 치자면 호박나이트 광고차 같은)에 맞춰 떠들거나, 틈만 나면 뚜껑달린 책상을 여닫아 교실 분위기를 흐트러트리거나 하며, 갓 입학한 초등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날이라면 ADHD 판정을 받을 이 아이에 학교 선생님도 두 손을 들고, 토토는 결국 엄마 손에 이끌려 새로운 종류의 학교에 가게 된다.

 

배경은 1940년대 군국주의 시대 일본. 초등학교 단체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를 받아줄 곳이 있었을까 싶은 시대배경이지만, 토토가 전학 간 "도모에 학원"은 놀랍게도 열차칸을 교실로 쓰고, 각 학생들은 본인이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순서대로 공부할 수 있고, 소아마비, 왜소증 등 신체장애가 있는 어린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무엇보다, 처음 보는 아이의 무슨 소린지 모를 이야기를 4시간이나 귀 기울여 들어주는 교장선생님(고바야시 소사쿠)이 아이들을 맞아주는 곳이었다. 이전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았던 토토는 이 곳에서,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의 자연주의 교육철학(아이들의 선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것에 중점을 둔 교육철학)에 따라 산책을 하고, 유리드믹스 교육을 받고, 친구들과 교류하며 많은 것을 배워나가게 된다.

 

이렇게, 크게 보자면 창가의 토토는 사회의 규격에 맞지 않는 어린 아이가 새로운 교육철학을 실천하는 대안학교에 가서, 비로소 본인에 맞는 교육을 받으며 적응을 해나가는 교육/성장 이야기의 형태를 갖추었다. 일반 학교에 적응을 못하던 토토는 도모에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사고를 치거나 다른 친구와 부딪히기도 하지만, 고바야시 선생님의 "너는 사실은 좋은 아이란다"라는 격려를 들으며 (본인도 그걸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도모에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도모에에서 토토는 새로운 친구에게 학교를 안내해준다거나, 소아마비 친구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를 알려준다거나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후반부에 고바야시 교장선생님에게 "나중에 커서 꼭 도모에의 선생님이 될거야"하고 약속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교장선생님이 진지하게 "꼭 그래주렴"하고 화답하는 장면은, 토토의 성장과 감화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무엇보다 본 내용이 작가가 머릿속으로 지어낸 소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람들과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큰 울림을 준다. 문제아 취급을 받던 토토는 자유로운 표현능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대 원로배우가 되었고, 함께 공부한 도모에의 다른 학생들도 사회에서 어엿하게 자기 몫을 하는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저자는 틈틈이 시대를 앞서간 고바야시 교장의 교육론을 소개하는데, 이는 일본이 전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실제로 대안교육을 행했던 열성적인 교육자가 있었다는 증언일 뿐만 아니라, 실제 아이들의 본성을 고려해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었던, 고바야시 교장의 교육론과 실제 교육방법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도 가치도 크다.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작품 중에 시대상이 드러나는 부분도 많은데, 사실 당시 일본 (그 중에서도 작품의 배경인 도쿄)에 해당되는 이야기들이다보니 낯설고 잘 와 닿지 않는 내용이 많다 (1214일 아코사건(赤穂事件)을 기리고자, 교감 격인 마루야마 선생님이 학생들을 이끌고 47인의 사무라이의 무덤이 있는 센가쿠지(泉岳寺)를 다녀오는 부분이라든가). 그런데 내용 중에 당시 일제 식민지를 겪었던 우리에게 특히 와 닿는 내용이 있는데, 바로 토토에게 "죠센징"이라고 소리를 치는 아이(마사오)의 이야기이다. 사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조선인이었는데, 그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죠센징"이라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었고, 욕설을 배우면 으레 다른 사람에게 따라해보는 여느 아이처럼, 그 아이도 다른 사람들에게 "죠센징!"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아이가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걱정스런 마음에, 조선 억양으로 "마사오쨩! 마사오쨩!"하며 애타게 아이를 찾곤 했다는 이야기에, 일본 사회에서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던 (어쩌면 지금도 받고있는) 재일교포의 아픔이 묻어나왔다.

 

이렇듯, 실제 있었던 학교와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창가의 토토를 보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일본제국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대에 어떻게 도모에 학원 같은 자유로운 교육기관이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고바야시 교장이 학교를 대외적으로 많이 알리지 않았던 것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추측을 제시하는데, 실상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게든 학교와 본인의 교육철학을 지키려던 고바야시 교장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이 된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를 버텨나가던 도모에 학원은, 격화되던 전쟁 속에서 미군의 폭격까지는 버텨내지 못했고, 불타는 학교를 보며 의연하게 "다음에는 어떤 학교를 만들까?" 하던 고바야시 교장은 결국 만년까지 도모에 학원을 되살리지 못하였다. 다만, 도모에의 교사가 되겠다고 약속했던 토토가 커서, 도모에의 이야기와 고바야시 교장의 교육방법을 기록한 책을 남기게 된 것이다.

 

끝으로, 제목에 있는 "창가의"라는 표현은, 책이 쓰이던 70년대 후반 일본에서 "정리해고를 앞두고 창밖이나 바라보며 소일하던 회사원"을 가리키는 말(“창가족”)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 사회는 교육열이 높고, 대학진학률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는 다르게 보자면, 대체로 천편일률적인 교육과정을 거쳐 대학에 진학할 것이 요구되는 사회여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진학을 위한 교육이 적성에 맞지 않거나, 학교 교육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은 외곽으로 내몰려 "창가의 학생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반세기도 더 전에 존재했던 대안적 교육현장의 모습을 증언하는 창가의 토토를 보며, 학생들의 '자연스러움'을 살려내고, 학생들을 "창가"에서 중심으로 되돌리는 교육의 필요성을 생각해 본다.

Posted by 푸른삼각주